오펜하이머 2023 – 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다

출처 : 오펜하이머 공식 티저 영상

정신분열을 일으킬 만한 불분명한 화면과 (나중에 알고 보니 핵분열(fission)과 핵융합(fusion) 반응이라는)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다. 이로 인해 그는 쇠사슬로 돌에 묶여 영원히 고문을 당했다.

라는 의미심장한 대사로 오프닝을 여는 영화. 이때 깨달았어야 했어.

포스터 출처 : TMDB

<28일 후>나 <피키 브라더스> 같은 극적인 서사에 킬리안 머피 특유의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 흥행성 영화가 아니라 지루하기 짝이 없는 다큐멘터리가 될 것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미리 대비하는 자세로 봤다면 그렇게 졸지 않았을 거야.

오펜하이머 청문회 장면(출처: 유니버설 픽처스)

다큐멘터리 형식인 것도 따분하지만 무려 3시간의 러닝 타임에 심지어 3개 시간대를 오가며 흑백과 컬러가 함부로 나오므로 더욱 분주한 영화”오펜하이머(Oppenheimer)”의 시작은 1942년 맨해튼 계획보다 10년이나 지난 1954년 원자력 협회 오펜하이머 청문회와 1959년 루이스·스트로스 제독의 인사 청문회에서 시작된다.오펜하이머만 나와도 무슨 내용인지 모르지만 다른 시간대의 또 다른 인물이 방대한 대사를 말하기도 했으며, 너무 많은 장면 전환과 캐릭터 설정에서 초반부터 멘털 붕괴던 영화.

포스터 출처 : 영화 공식 홈페이지

게다가 원폭실험 장면이 담긴 장렬한 포스터 그림은 영화에서 딱 한 번 나올 뿐 그렇게 강렬하지도 않아서 아주 조금 속은 느낌도 든다.

책 표지 출처 : 교보문고

영화가 여기까지 지리멸렬한 이유는 “아메리칸·프로메테우스”는 장황하게 1000쪽을 넘는 그의 평전을 원작으로 해서 그렇다고 하지만 그 연출을 크리스토퍼·놀런 감독이 맡았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그는 바로”배트맨”시리즈나 “인셉션”,”인터 스테라ー”등에서 긴박하면서도 화려한 연출로 유명한 분 아닌가.그러나 여기에서는 그 화려함이(내 기준으로는)1개도 못하고 오히려 너무 리얼해서 정말 오펜하이머의 전기 글을 읽은 느낌이었다.물론 너무 빠른 장면 전환과 방대한 대사 양으로 놀란 감독 특유의 긴박감이 느껴졌다.그래도 그의 페르소나이며 최근 화제가 되는 수많은 배우 키리앙·머피가 나온 것으로 본 김에 오펜하이머의 생애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정리했다.즉, 이하의 내용은 영화를 시간 순서로 재구성했다고 생각하면 좋겠다.줄리어스, 로버트·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 1904~1967)

오펜하이머(사진출처: 위키백과)J. 로버트·오펜하이머(1904~1967)는 미국 뉴욕 태생으로 독일계 유대인 아버지가 옷 사업에 성공하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그는 어릴 적부터 광물 수집이 취미로 광물의 성격을 공부하고 자연스럽게 물리학의 길로 접어들면서 어학에도 소질이 있어서 그리스어 프랑스어 독일어에 유창하고, 산스크리트어에도 흥미를 느끼고 힌두교의 경전까지 번역했다고 한다.원래 지혜로웠는데, 유태인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에 집착하지 않고 이 같은 다능한 취미로 발전한 것 아닌가 싶다.참고로 1954년 오펜하이머 청문회에서 나온 “나는 이미 죽음이며 세상의 파괴자가 됐다”라는 말은 힌두교 경전<바가바ー도기타ー>에서 인용한 문구이다.여하튼 이런 천재성으로 1925년 하버드 대학 화학과를 3년 만에 조기 졸업하고 케임브리지 대학의 크라이스트 칼리지에 입학하게 되지만…이래봬도1920년대 대학원 이적과 양자 역학과의 만남독사과를 가지고 있는 닐스 보아 (출처: 유니버설 픽처스)케임브리지대학원 시절 이론물리학자로 실험물리학에 서툴렀던 22세의 젊은 오펜하이머는 지도교수 패트릭 브라켓이 실험에서 제외하고 잡일만 시키면 신경쇠약에 걸린 나머지 앙심을 품고 교탁에 있던 사과에 독극물을 주입한다. 하지만 교수가 독사과를 먹기 전 벌레 먹은 사과라고 쓰레기통에 버리는데, 영화에서는 양자역학의 아버지 닐스 보아(1885~1962)가 사과를 집어드는 장면으로 각색됐다.닐스 보아 (사진출처: 위키백과)닐스 보아 (사진출처: 위키백과)출처 : 오펜하이머 공식 티저 영상그의 제자 닐스 보어가 원자핵과 전자 사이에 특정 값을 가진 궤도가 존재해 서로 만날 수 없다는 일명 ‘보어 모델’을 제시했고, 여기서 전자가 왜 허용된 궤도에만 존재하는지 증명하기 위해 엘빈 슈뢰딩거가 ‘파동역학 방정식’을 발표했지만 방정식의 해가 무수히 많아지자 (마치 빛의 산란처럼) 오펜하이머의 지도교수 맥스 보른이 통계적으로 분석해 ‘확률 밀도 함수’로 재정립한 것이다.맥스 보른 (사진 출처: 위키백과)*맥스, 보른(Max Born, 1882~1970):독일의 이론 물리학자.슈뢰딩거 방정식에 있는 파동 함수의 제곱이 전자가 발견된다”확률 밀도 함수”와 재해석하고 이 이론이 양자 역학의 핵심 토대가 되는 1954년 노벨 물리학 상 수상 여담으로 맥스, 보른은 학자치고는 인물이 꽤 수준이 높지만 영국의 가수에서 배우 올리비아, 뉴턴 존의 외 할아버지이다.뮤지컬 영화”글리 즈”에서 존, 트래 볼타와 장난친 그녀가 사실은 양자 역학을 집대성했던의 자손다니 매우… 그렇긴슈뢰딩거 고양이 (출처: 위키백과)덧붙이자 슈뢰딩거는 보른이 자신의 이론을 반박하자 ‘슈뢰딩거 고양이’라는 사고 실험을 통해 양자역학 개념을 역설했다. 상자 안에 고양이와 독극물이 담긴 병을 담았을 때 고양이가 죽을 확률은 50%지만 상자를 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는 것. 즉 상자 안에는 고양이가 죽을 확률과 살아있을 확률이 동시에 존재해 거시세계와 미시세계의 중첩 상태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오히려 보른보다 유명해졌다는 아이러니.미국으로 돈이 환향하는 오펜하이머 (출처: 유니버설 픽처스)여하튼 이런 기 마라톤 같은 물리학자 사이에서 배우는 동안, 오펜하이머는 불과 9개월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보른과 함께 핵 운동을 전자 운동과 분리하여 계산한 Born-Oppenheimer근사 법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고 유명하게 된다.그 뒤 1927년 캘리포니아 공과 대학(Caltech)에서 펠로십을 갖고 1928년 네덜란드의 라이덴 대학에서 네덜란드어로 강의하고 깊은 인상을 남겨(이 에피소드도 영화에서 조금 지나, 그 후 UC버클리에서 부교수직을 제안되자 동시에 결핵으로 진단된 가족 목장이 있는 뉴 멕시코 주에서 요양하는 사막을 연상시키는 거기에 매료된다.1936년, 진·타토롯크과 열애진 태틀록과 오펜하이머 (출처: 유니버설 픽처스)물리학 분야에서 승승장구하던 오펜하이머는 1929년 월가의 주가가 폭락하는 대공황이 되면 좌파 사상에 휩쓸리기도 했지만, 그러면서 만난 사람이 같은 대학 문학 교수의 딸로 스탠퍼드 의과 대학생인 미국 공산당 당원인 진·타토롯크(1914~1944)이다.진·타토롯크을 맡은 후로ー렝스·휴(Florence Pugh, 1996)는 영국 배우에서 싱어송 라이터에서 2019년도 영화” 작은 아씨들”에서 가장 어린 에이미로 열연했지만 여기에서는 무려 20살이나 차이가 난 키리앙·머피(1976)과 호남 장면을 찍는 것만큼 성숙미를 자랑한다고 한다.이어 관계 도중”바가바ー도기타ー”을 넓히다 보라고 윽박지르는 카리스마에 혀를 내둘렀다.이때 나온 구절이 바로”나는 죽음이며 세상의 파괴자였다”로 진 실제 자살로 오펜하이머의 인생을 파괴하는 데 한몫 하게 된다.1936년, 키티와의 불륜 1940년 결혼오펜하이머가 세 번째 남편인 다혼의 상징 키티(출처: 유니버설 픽처스)찡~결혼하고 싶었지만, 2번이나 거절당한 오펜하이머는 그 해 8월, 스페인 내전의 공화 국군 모금 운동에 참여하고 기혼자 캐서린(애칭 키티)와 눈이 맞다.그런데 이 캐서린이라는 여성의 인생도 비참한 것이 공산 당원의 남편 조·다렛토이 스페인 내전 중 사망하자 미국으로 돌아가서 학업을 마치고 다음 1938년에 의사의 리처드·해리슨과 재혼했고 캘리포니아 대학 대학원에 다니는 오펜하이머와 불륜 관계를 유지하지만 그런 1940년 멕시코에 있는 오펜하이머의 목장에서 함께 보내고 갑자기 아이가 태어나면 이혼하고 처음 오펜하이머와 결혼하게 된다.불완전한 연애와 결혼만큼이나 오펜하이머는 과학자 인생에도 태클이 들어오는데 공교롭게도 2번의 열애 상대 함께 공산 주의자이며 심지어 키티와 결혼한 상태에서와 불륜을 했기 때문에 전후 냉전 시기에는 사상 검증까지 받는 불순 분자로 의심되는 결국 과학자 인생에도 발목을 잡는 얄궂은 결과를 가져온다.1939년 이차 세계 대전 1942년 맨해튼 계획폴란드 바르샤바 왕궁 광장에 전시된 제2차 세계대전 중 사진1929~1939년까지 10년간의 대공황으로 세계 경제가 피폐해진 가운데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1년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까지 일어나자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미국 과학자 아카데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원자폭탄을 만들자고 제안했고, 그 결과 1942년 세계 최초의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계획(Manhattan Project)이 수립된다.레슬리 그 로브즈와 오펜하이머 (출처: 유니버설 픽처스)프로젝트의 총 책임자는 미 육군 소장 레슬리·그로ー브즈(Leslie Groves, 1896~1970)이며, 배역은 뇌 세쿠 배우로 유명한 매트, 데몬(1970)가 열연했지만 실제 일이 꽤 살집이 있었기 때문에 리즈 시절의 매트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레슬리·그로ー브즈(Leslie Groves, 1896~1970):MIT재학 중 육군 사관 학교에 지원할 정도로 조밀 덕.1940년 미 국방부 펜타곤 공사 총 책임자.제1,2차 세계 대전에도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때 원자 폭탄 개발 총 지휘.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 투하 후도 일본이 항복하지 않으면 15발을 더 투하하면 할수록 목표 달성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그런 업무 스타일을 싫어한 아이젠 하워가 마셜의 뒤를 이어 미국 육군 참모 총장이 되고 태클을 걸어 1948년에 제대뉴멕시코주에서 실태조사 중인 오펜하이머(출처: 유니버설 픽처스)오펜하이머는 프로젝트에서 중성자 계산을 담당하게 되는데 레슬리는 기존 연구소와 별도로 원자폭탄을 실제 제작할 수 있는 연구소를 계획하고 있으며, 이에 오펜하이머가 소장을 맡아 평소 동경하던 뉴멕시코주에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를 설립, 6천명의 연구원을 이끌고 핵무기를 제작하기에 이른다.원폭 연구 중 난입한 놀런 감독(출처: 유니버설 픽처스)원폭 제작 장면 (출처 : 유니버설 픽처스)드디어 제작 단계에 돌입했고고뇌하는 킬리안, 아니 오펜하이머 (출처: 유니버설 픽처스)세계 최초 핵실험인 트리니티 실험을 앞둔 오펜하이머는 윤리와 전쟁의 이익 속에서 고민하며 <바가바드 기타> 속의 문구를 되뇐다。우리는 세상이 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웃지 않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침묵했습니다. 저는 힌두교 성경 바가바드 기타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이제 저는 세계의 파괴자인 죽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든 그렇게 생각했다고 생각합니다.원폭 실험 장면 (출처 : 유니버설 픽처스)그리고 엄청난 폭발력을 자랑하고 폭발하는 원자 폭탄···1945년 7월 16일 실험 성공 이후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각각 원자 폭탄이 투하된 세계 최초로 핵무기가 전쟁에 투입되어 그 결과 수십 만명의 민간인이 희생 되면 일본은 8월 15일에 항복을 선언했지만 당시 추축국였던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과 나치·독일은 이미 5월에 항복하면서 제2차 대전은 자동적으로 종결하다.그리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뽑힌 이유는 지대가 평평하고 원자 폭탄의 폭발력이 관찰되기 쉽기 때문이라고.실제로, 오펜하이머는 영화처럼 시종 고뇌에 빠지지 않고 전쟁을 확실히 끝낼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판단 아래 끝까지 실험에 임했다고 한다.그러나 피해 규모가 생각보다 엄청난 것으로 뒤늦게 죄 의식을 느끼며 영화 같은 멘붕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1954년, 오펜하이머 청문회오펜하이머 청문회 장면(출처: 유니버설 픽처스)전후 오펜하이머는 미국이 소련에 핵폭탄을 투하하는 3차대전 시나리오를 세우자 경악해 폭탄 제조에 반대하고 가뜩이나 냉전시대 사상검열이 심했던 미국에서 소련 스파이로 의심돼 1954년 청문회가 열리는데 이곳에서 그는 보안접근 권한을 빼앗기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렇게 된 데는 원자력 위원회 회장 루이스 스트로스의 공작이 있었지만… 1959년 루이스 스트로스의 청문회루이스 스트로스 (사진 출처: 위키백과)루이스 스트로스(Lewis Lichtenstein Strauss, 1896~1974)는 독일 유대계 이민자 출신으로 물리학도를 꿈꿨지만 병에 걸려 학업을 포기하고 사업가의 길로 들어섰고 뒤늦게 미 해군과 연결돼 원자력위원회(AEC) 의장을 역임한 인물이다.루이스 스트로스와 오펜하이머 (출처: 유니버설 픽처스)그는 맨해튼 프로젝트가 성공하자 원자폭탄보다 강력한 수소폭탄 개발을 추진했으나 오펜하이머가 이에 반대해 정통 물리학자 출신이 아닌 그를 디스하는 발언(천박한 구두 판매원 등)을 해 악연이 됐고, 그 결과 1954년 오펜하이머 청문회에서 공산주의자 연인들을 사귄 이력을 빌미로 러시아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원자력 분야에서 완전히 숙청되고 만다.1959년 루이스 스트로스 청문회 (출처 : 유니버설 픽처스)루이스 스트로스로 분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1965), 보기 좋게 나이 드는 몇 안 되는 배우. 비록 맡은 역할은 소인배일지라도 이렇게라도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1959년 루이스 스트로스 청문회에서 발언하는 데이비드 힐 (출처: 유니버설 픽처스)오펜하이머 청문회 후 5년이 지난 1959년 루이스는 장관 취임을 앞두고 인사청문회에 임하게 되는데, 이때 스트로스의 보좌관이자 핵물리학자 데이비드 힐(1919~2008)이 오펜하이머 사건의 진실을 접하고 스트로스가 개인적 원한으로 마녀사냥을 한 사실을 고발한다. 저 평범한 액면가가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포드란니 프레드 머큐리를 연기한 라미 말렉(Rami Malek1981)인 줄 누가 알았을까.『피키 브라인더스』의 토마스를 떠올리게 하는 오펜하이머(출처: 유니버설 픽처스)사람보다 비범한 지식과 노력이 과학 발전을 빚기도 했지만 인류 살상의 무기도 된 격동의 20세기 초두이과와 문과를 오가던 천재 물리학자 오펜하이머는 유리 멘탈의 자아를 극복하고 무기라도 더 큰 전쟁을 막는 인류 과학사에 기여했지만 순간 순간의 죄가 쌓일 과학계에서 퇴출되는 아픔을 경험한 것으로, 지식적으로 인성도 중요하다고 알게 된다.그리고 막상 영화를 볼 때는 심하게 졸았다만-정리하면서 자세히 보면 키리앙·머피가 열연한 고뇌하는 오펜하이머의 모습만은 최고였다고 생각한다.역시 키리앙·머피는 한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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